BIS(국제결제은행) 신현송 경제고문이 최근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제목은 "토크노믹스와 블록체인 파편화." 글로벌 통화 질서의 최전선에 있는 인물이 블록체인의 구조적 한계를 수학적 모델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업계 안팎에서 화제가 됐다.
나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부분이 꽤 있다. 수수료 구조의 모순, 스테이블코인의 분절성 문제 — 이건 블록체인 진영이 솔직하게 직시해야 할 숙제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 "블록체인 혁신은 결국 중앙은행의 신뢰에 닻을 내려야 완성된다"는 주장은 수용하기 어렵다. 진단은 날카롭지만, 처방이 너무 단조롭고 성급하다.
파편화는 버그가 아니라 경쟁의 현장이다
신 교수는 새로운 체인이 계속 등장하는 현상을 네트워크 효과의 붕괴로 읽는다. 나는 다르게 본다. 이건 1990년대 초 인터넷 환경과 판박이다. 당시에도 통신 프로토콜이 난립했다. 그때 누군가 "표준이 너무 많아서 인터넷은 망할 것"이라 했다면, 그 사람이 틀린 거다.
경쟁은 가장 강력한 효율화 도구다. 이더리움 가스비가 치솟자 솔라나와 아비트럼이 등장했고, 그 압박이 이더리움 스스로를 바꾸게 했다. EIP-4844 (이더리움의 수수료를 획기적으로 낮추는 기술 표준) 적용 이후 레이어2 수수료는 90% 이상 떨어졌다. 경쟁이 없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변화다. 파편화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최적의 프로토콜을 찾아가는 진화의 과정일 뿐이다.
'고립된 섬'은 이미 연결되고 있다
논문은 블록체인을 서로 단절된 섬들로 묘사한다. 하지만 기술은 논문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Circle의 CCTP(서로 다른 블록체인 간에 자산을 안전하게 옮기는 표준 기술)는 이미 25개 이상의 체인에서 USDC를 네이티브 방식으로 이동시킨다. 예전처럼 불안한 브릿지를 건너는 게 아니라, 고속도로가 깔리는 중이다. Chainlink CCIP, LayerZero (블록체인 간 통신을 돕는 도로 같은 기술들)도 마찬가지다. 학계가 구조적 불가능성을 논증하는 동안, 개발자들은 코드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모델이 놓친 것: 이념적 참여
신 교수의 모델은 검증인을 오직 수익률로 움직이는 경제적 행위자로 가정한다. 그러나 비트코인을 보라. 22년, 단 한 번의 중단도 없었다. 참여자들은 돈만 보고 움직이지 않는다. 검열에 저항하겠다는 신념, 중앙은행의 통화 팽창에 대한 헤지 수요가 이들을 붙잡아둔다. 오픈소스 생태계의 자발적 헌신을 임금 협상하는 노동자 모델로는 설명할 수 없다. 모델의 한계가 결론의 강도를 제한해야 한다.
중앙은행 단일 원장, 그게 정말 정답인가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 중앙은행의 '단일 원장'은 매력적이다. 자금세탁 방지 (AML), 고객 알기 제도(KYC), 그리고 금융 안정성까지. 그들이 왜 단일 원장에 집착하는지 그 고뇌를 이해한다. 하지만 그 안전을 명분으로 혁신이라는 심장까지 멈추게 해서는 안 된다.
최근 대안으로 떠오르는 '상업은행 예금 토큰화' 모델 역시 마찬가지다. 훌륭한 타협안처럼 보이지만, 결국 '누구의 원장 위에서 어떻게 상호운용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해야 한다. 시스템의 안정성이 폐쇄성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중앙화된 시스템은 거대한 단일 실패 지점 (Single Point of Failure)을 만든다. 정치적 압력으로 계좌가 동결되거나 시스템이 마비되면 전체가 멈춘다. 2008년 금융위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이다. 분산화의 비효율은 역설적으로, 시스템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도록 막는 면역 체계다.
비트코인은 애초에 결제 시스템이 아니다
논문은 블록체인 전체를 통화 시스템 경쟁으로 본다. 여기서 오해가 생긴다. 비트코인은 비자와 경쟁하는 결제 수단이 아니다. 디지털 금이다. 무검열 가치 저장 수단이다. 수수료가 높다는 건 시스템 실패가 아니라, 높은 보안을 위한 비용이다. 소액 결제는 라이트닝 네트워크가 담당하면 된다. 비트코인, 이더리움, 스테이블코인, 디파이를 하나의 잣대로 재단하는 건 애플과 구글을 같은 회사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신현송 고문의 논문은 블록체인 업계가 귀 기울여야 할 현실을 짚었다. 그 통찰은 존중한다. 그러나 "미래는 중앙은행 앵커링뿐"이라는 결론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인터넷이 중앙 정부의 통제 없이 인류의 삶을 바꿨듯, 블록체인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며 진화하고 있다.
파편화는 실패의 흔적이 아니다. 새로운 금융 지형도를 그려나가는 진화의 흉터다. 그리고 그 지형도를 설계하는 속도는, 중앙은행의 기획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