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 붙는 스테이블코인(달러에 1:1로 연동되는 디지털 화폐)은 새로운 결제 수단이 아니라, 은행 예금을 빨아들이는 삼투압 펌프다. 둑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둑의 시멘트가 천천히 녹는 중이다.
시장의 표면 — "그냥 더 빠른 달러"라는 내러티브
월가와 실리콘밸리는 이 자산을 "프로그래머블 머니", "온체인 달러"라고 부른다. 송금 빠르고, 24시간 정산되고, 해외 이체 수수료가 싸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표면 아래를 한 번 보자.
① 시장 사이즈가 이미 컨센서스(시장 평균 예상치)를 넘어섰다
- 2025년 말 기준 전체 스테이블코인 시총 $280B~$300B(약 380~410조 원), 그중 97%가 USD(미국 달러) 페그.
- 그중 yield-bearing(이자가 붙는) 카테고리는 2023년 $1B 미만 → 2025년 9월 $19B+. 2년 만에 19배.
- 이건 결제 수단의 성장 곡선이 아니다. 저축 수단의 성장 곡선이다. 사람들이 송금하려고 사는 게 아니라, 이자 받으려고 들고 있는 거다.
② "그냥 토큰" 아니다 — 단기 국채를 깔고 앉은 디지털 예금통장
발행사들은 토큰을 찍을 때 받은 돈으로 미국 단기 국채를 산다. 그 국채에서 나오는 이자를 토큰 보유자에게 나눠주는 구조다. 사실상 디지털 머니마켓 펀드(MMF: 단기 국채 등에 투자해 이자를 주는 펀드).
- Ondo USDY: 단기 미 국채 + 은행 예금 담보, 연 4.65% 이자.
- Mountain USDM: 6개월 미만 단기 국채 85% + 예금 15%, 연 5% 이자.
- 미국 일반 시중은행 보통예금 평균 금리가 0.4~0.6%대. 격차가 10배 가까이 난다.
③ 그래서 은행 돈이 빠진다 — 데이터로 이미 확인됨
미국 주간 데이터로 회귀분석을 돌려보니, 은행 예금금리가 1bp(0.01%) 오르면 스테이블코인 시총 성장률은 약 3%p 둔화된다. 비트코인으로 같은 분석을 돌리면 효과가 안 나온다. 즉, 시장은 비트코인과 스테이블코인을 전혀 다르게, 스테이블코인과 은행 예금은 거의 같은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④ 규제가 자살골을 넣는 구조 — LCR 함정
여기가 진짜 균열이다. 은행은 Basel III(국제 은행 규제 체계)의 LCR(Liquidity Coverage Ratio: 30일 유동성 비율) 규정 때문에, 예금 종류별로 "위기 때 얼마나 빠져나갈지" 가중치를 다르게 매겨야 한다.
- 개인 소매 예금: "잘 안 빠진다" → 가중치 5%
- 금융기관이 맡긴 거액 예금: "위기 때 즉시 다 빠진다" → 가중치 100%
이게 왜 문제냐. 김씨가 은행에서 1억을 빼서 스테이블코인을 샀다고 치자. 그 1억은 발행사 명의로 다른 은행에 다시 들어간다. 총액은 그대로. 그런데 분류가 "개인 예금"에서 "금융기관 거액 예금"으로 바뀐다. 받은 은행은 이 1억을 대출에 쓸 수 없다. 100% 그대로 비상금처럼 깔고 앉아야 한다.
이면의 균열 — "Closed Loop"이라는 거짓말
이건 내 해석이지, 공식 전망이 아니다.
스테이블코인 옹호자들은 말한다. "예금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A은행에서 B은행으로 옮길 뿐이다." 거래 흐름만 보면 맞다. 받은 달러는 결국 어딘가의 은행 계좌나 국채 시장으로 돌아온다.
문제는 돈의 성질이 바뀐다는 거다. 끈적한 개인 예금(쉽게 안 빠지는 돈)이 휘발성 높은 거액 자금(언제든 도망갈 수 있는 돈)으로 화학적 변환된다. 같은 H₂O처럼 보이지만 한쪽은 얼음, 한쪽은 수증기다. 얼음으로는 그릇을 만들 수 있고, 수증기로는 못 만든다.
ECB(유럽중앙은행) 모델링은 이 현상을 수치로 보여준다. 스테이블코인이 $1 증가할 때 시스템 전체 국채 보유는 $0.86~$1.26 증가한다. 이게 무슨 의미냐면 — 가계 저축의 종착지가 민간 대출(기업 운전자금, 주택담보대출, 자영업자 대출)에서 정부 국채로 조용히 이동한다는 거다. 정부는 돈 빌리기 쉬워지고, 동네 빵집은 어려워진다.
미국 은행권 협회 분석은 yield-bearing 스테이블코인이 본격화되면 미국 소비자·중소기업·농업 대출이 최대 1/5(20%) 축소될 수 있다고 본다. 단순히 돈이 옮겨 다니는 거였다면 이런 숫자가 나올 수 없다.
(스테이블코인은 예금을 재분배하는 게 아니라 재분류한다. 그리고 그 새 분류는 은행 대출 능력에 독약이다.)
Skin in the game — 2008년에 봤던 그 영화
2008년 MMF가 은행 예금을 빨아들이는 속도를 실시간으로 봤다. 그때도 똑같았다. "MMF는 그냥 더 효율적인 현금 보관소다", "어차피 자금은 시스템 안에 있다." 그러다 Reserve Primary Fund(미국 최초의 MMF 중 하나)가 break the buck(1달러 원금 보장이 깨지는 사태)을 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나. 단기 자금시장 전체가 며칠 만에 얼어붙었고, 연준이 긴급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급조해서 막아야 했다.
지금의 yield-bearing 스테이블코인은 그 MMF의 디지털 후손이다. 차이는 두 가지.
- 속도가 더 빠르다. 24시간 환매 가능하니까 뱅크런이 일어나면 SVB(실리콘밸리은행, 2023년 파산) 사건 때보다 더 빠르다. SVB는 트위터에서 소문 퍼지고 36시간 만에 무너졌다. 스테이블코인은 그것보다 더 빠를 수 있다.
- 최종 대부자가 없다. 발행사는 연준의 비상 자금 창구에 접근권이 없다. lender of last resort(최종 대부자, 위기 때 돈 빌려주는 중앙은행)가 없는 MMF — 이게 시스템 리스크의 새 얼굴이다.
진화의 흉터로 재프레이밍
그렇다고 이게 종말은 아니다. 균열이 보인다는 건 시스템이 진화 압력을 받고 있다는 신호다.
은행은 두 갈래로 대응 중이다. 하나는 가격 경쟁 — 예금금리를 올려서 NIM(Net Interest Margin: 예대마진)을 깎는 방식. 이건 대형 은행이 견딘다. 지역 은행은 못 견딘다. 또 하나는 tokenized deposit(토큰화 예금: 블록체인 위에 올린 은행 예금) — JPMorgan이 만든 JPM Coin이 그 예다. 예금자 보호도 그대로, 규제도 그대로, 그러면서 24시간 즉시 정산.
이건 단순한 방어가 아니라 은행의 DNA 업그레이드다. 인터넷이 신문사를 다 죽인 게 아니라 어떤 신문사만 죽였듯, 스테이블코인은 어떤 은행만 도태시킬 거다. 살아남는 쪽은 자기 장부 자체를 코드로 다시 쓰는 곳이다.
규제 쪽도 움직인다. EU의 MiCA법은 스테이블코인의 이자 지급을 전면 금지. 미국 GENIUS Act는 발행사가 직접 이자 주는 걸 막되, CLARITY Act 404조에서 "이자처럼 작동하는 인센티브"를 어디까지 막을지 공방 중이다. "동일한 활동에는 동일한 규제"가 표준이 될 거다 — 시장이 먼저 가고, 법은 늘 뒤늦게 따라온다.
뉴스 헤드라인을 보는 사람에게는 "디지털 달러 혁신",
은행 임원 회의실에 앉아본 사람에게는 소리 없이 빠지는 funding base(자금 기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