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곧 도착합니다"를 외쳐온 사람이 있다. 레이 커즈와일. 그의 2024년 신간 『특이점은 더 가까워졌다』는 20년 전 예측을 한 글자도 물리지 않았다 — 2029년에 인간급 AI, 2045년에 인간과 기계의 융합. 내비게이션이 부르는 도착 시간은 못 믿어도, 길 자체는 맞는 경우가 많았다. 이 책도 그렇게 읽으면 된다.
그가 말하는 미래의 순서
① 기술은 계속 빨라진다
그가 '수확 가속의 법칙'이라 부르는 현상 — 기술이 기술을 낳으면서 발전 속도 자체가 빨라진다는 것 — 이 책의 토대다. 실제로 컴퓨터의 가격 대비 성능은 80년 넘게 한 방향으로만 움직였다. 릴레이에서 진공관, 트랜지스터, 반도체, 그리고 지금의 AI 칩까지 — 매번 "이제 한계다" 소리가 나왔고, 매번 틀렸다. 챗GPT 같은 AI가 등장한 시점도 그가 2005년에 찍어둔 시간표와 얼추 맞아떨어졌다.
② 2029년, 인간급 AI
AI가 튜링 테스트(대화해보고 상대가 사람인지 AI인지 구분 못 하면 통과)를 제대로 통과하고, 이후 거의 모든 지적 작업에서 인간을 앞서기 시작한다는 예측이다. 지금의 AI 열풍을 그는 거품이 아니라 예고편으로 본다. 2005년 전작에서 이 예측을 내놨을 때는 조롱이 대세였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같은 말을 하면 진지한 반박 세미나가 열린다. 조롱에서 반박으로 — 그 거리만큼 세상이 움직인 셈이다.
③ 2030년대, 의학이 노화를 따라잡는다
혈관 속을 다니며 치료하는 초소형 로봇, 그리고 뇌를 클라우드(인터넷 저장 공간)에 직접 연결해 생각의 용량 자체를 늘리는 기술이 2030년대에 온다고 본다. 그리고 "장수 탈출 속도" — 의학이 수명을 늘리는 속도가 늙는 속도보다 빨라지는 시점을 그는 2029~2035년으로 본다. 러닝머신 위에서 뒤로 밀리는 속도보다 앞으로 걷는 속도가 빨라지는 순간이다.
④ 2045년, 융합
인간 지능이 AI와 합쳐져 "백만 배" 확장된다는 주장. 여기부터는 과학이라기보다 철학이다. 나를 디지털로 옮겨도 그게 여전히 '나'인가 — 그는 그렇다고 답한다. 동의하든 안 하든, 정체성과 죽음의 정의를 다시 묻게 만드는 챕터인 건 분명하다.
다만, 책장을 넘기기 전에
여기서부터는 서평이 아니라 내 개인 메모다.
그의 채점표부터 보자. 본인은 과거 예측의 약 86%가 맞았다고 주장하는데, 남이 채점하면 점수가 내려간다 (정확한 수치는 확인 필요). 자율주행처럼 스스로 후하게 매긴 항목들이 있다. 수험생이 직접 채점하는 시험은 원래 점수가 잘 나온다. 그래도 큰 그림 — 컴퓨팅 비용의 하락, AI의 부상, 유전자 분석 비용의 폭락 — 은 대체로 그의 편이었다는 점 역시 기록해둘 만하다.
그리고 이 책의 가장 무리한 구간. "지금 AI가 대단하다"에서 "10년 뒤 혈관 속 로봇"으로 건너뛰는 대목인데, 진지한 독자 대부분이 여기서 내린다. 반도체는 2년마다 두 배씩 좋아질 수 있어도, 사람 몸과 정부 규제는 그런 속도로 움직여본 적이 없다. AI가 통제를 벗어날 위험이나 기술 악용 문제도 다루긴 하는데, 분량이 눈에 띄게 얇다. 이 책의 약점이다.
균형추는 간단하다. 반도체의 속도와 생물학·제도의 속도는 다른 시계를 쓴다. 그가 한 손으로 열심히 피칭하는 동안, 다른 손엔 이 문장을 쥐고 읽는 게 남는 장사다.
1999년의 기억
1990년대 말 홍콩에서 일할 때 "인터넷이 세상을 다 바꾼다"는 말을 매일 들었다. 그 말은 결국 다 맞았다. 그런데 그 말을 믿고 1999년 꼭지에 산 사람과, 거품이 꺼진 2003년에 산 사람의 계좌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다. 방향이 맞아도 타이밍이 틀리면 돈은 남지 않는다. 나스닥이 2000년 고점을 되찾는 데 15년이 걸렸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는 동안에도 그랬다. 커즈와일을 읽는 내내 붙잡고 있어야 할 문장이다.
그래도 이 책이 밥값 하는 이유
경제 챕터 하나 때문이다. 논리는 단순하다. AI 덕에 '똑똑함'이 물이나 전기처럼 흔해지면, 정보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의 가격은 0을 향해 떨어지고, 비싼 것의 자리가 바뀐다. 나라 경제 규모(GDP)는 제자리여도 실제 삶의 질은 올라가는, 통계와 체감이 갈라지는 시대가 온다는 얘기다. 다들 귀하다고 여기던 게 흔해지고, 아무도 안 보던 게 귀해진다. 지난 세기엔 힘센 근육이 그 길을 걸었고, 이번엔 화이트칼라의 머리가 그 순서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2030년대에 기본소득(일하지 않아도 국가가 지급하는 최소 생활비, UBI) 논의가 장식용이 아니라 실전 의제로 올라온다고 본다. 일자리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더 높은 층으로 이사 간다는 게 그의 결론이지만, 이사 비용을 누가 내는지는 책에 안 나온다.
그럼 다음에 귀해지는 건 뭔가. AI를 돌리는 데 필요한 반도체와 전기인가, 아무리 찍어내도 늘어나지 않는 자산인가. 이 질문 하나를 얻는 값이라면, 책값은 싸다. 물론 답이 정해진 질문이 아니다. 곡선이 그의 말대로 꺾이지 않을 가능성, 그 사이에 낀 거품이 먼저 터질 가능성도 같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봐야 공정하다.
지능이 물처럼 흔해진 세상에서,
당신이 가진 것 중 여전히 귀한 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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