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의 5,000년 역사는 장부(ledger)의 역사이고, 장부의 역사는 결국 지우개를 누가 쥐느냐의 역사다. 잉크는 언제나 시민이 채웠고, 지우개는 언제나 권력이 쥐었다.
화폐는 물건이 아니라 기록이었다
① 물물교환은 신화다
-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결론 — 물물교환으로 굴러간 사회는 역사상 없었다
- 원시 공동체는 선물과 부채의 기억, 즉 머릿속 장부로 작동했다
- 주화는 공동체 신뢰가 던바의 수(Dunbar's number, 인간이 안정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인원 한계)를 넘어서자 등장한 장부의 물질화였다
② 주화의 탄생과 함께 온 첫 지우개질
- 기원전 7세기 리디아 왕국 — 일렉트럼 주화로 상거래를 '무게 달기'에서 '개수 세기'로 전환
- 천연 일렉트럼의 금 함량은 73%, 왕실 주화는 54% — 그 차액이 시뇨리지(seigniorage, 화폐 발행 이익)의 원형이다
- 백성의 대응은 즉각적이었다 — 순도 높은 옛 주화는 장롱으로, 물 탄 새 주화는 시장으로. 그레샴의 법칙은 법으로 공식화되기 2,000년 전부터 생활의 지혜였다
③ 장부는 국경을 넘고, 왕은 칼을 뽑는다
- 12세기 성전기사단 — 런던에 금을 맡기고 신용장 한 장으로 예루살렘에서 인출. 세계 최초의 다국적 송금 네트워크
- 1307년, 기사단에 빚을 진 프랑스 필리프 4세가 기사단을 일제 체포 — 유럽 최대의 장부가 하룻밤에 지워졌다
- 그 공백을 90년 뒤 피렌체의 메디치가 메웠고, 르네상스의 자금줄이 됐다
④ 종이는 더 빠른 장부, 더 빠른 지우개
- 13세기 원나라 교초 — 은 태환을 끊는 순간 세계 최초의 법정화폐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직행
- 전비 조달을 위한 무제한 인쇄 — 제국 경제 마비, 백성은 금속 사재기로 회귀
중앙은행들이 갑자기 코딩을 배우는 이유
이건 나만의 생각일 수 있다.
1971년 닉슨 쇼크로 금 태환이 끊긴 뒤 금은 온스당 35달러에서 4,300달러대로 올랐다. 달러 구매력 기준 약 87%가 증발한 55년이었고, 우리는 지우개에 아무 물리적 제약이 없는 첫 실험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사실 붕괴는 예고돼 있었다.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이 1960년에 이미 지적한 대로, 세계에 달러를 공급하려면 미국은 적자를 내야 하고, 적자를 내면 금 태환 약속은 산수가 안 맞는다. 지우개는 선택이 아니라 설계상 필연이었던 셈이다.
그 실험의 한복판에 비트코인이 등장했다. 국가 없이도 장부가 돌아간다는 사실의 증명. 현재 130개 이상의 관할권이 CBDC(중앙은행 디지털 화폐)를 검토 중인 것은 각국 중앙은행이 갑자기 기술 애호가가 돼서가 아니라, 저 증명이 그들의 독점 사업권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대응은 이미 실전 단계다. 한국은행의 프로젝트 한강은 시중은행 7곳, 사용자 8만 명, 가맹점 1만 2,000곳을 태운 통합 원장(unified ledger) 실험이었다. 반면 브라질의 드렉스는 프라이버시와 프로그래밍 가능성을 동시에 잡으려다 초당 10건이라는 처리 속도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국가 결제망으로는 낙제점이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다. 감시하려는 국가와 숨고 싶은 시민이 한 장부 위에서 만나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터진다.
현금 없는 사회의 청사진도 같은 시험대에 오른다. 종이 현금은 불편하지만, 정전과 해킹과 마이너스 금리와 알고리즘 감시 앞에서 개인이 쥘 수 있는 마지막 오프라인 백업이기도 하다. 그 백업을 지우고 나면 장부의 모든 페이지가 실시간으로 열람 가능해진다 — 누구에게 열리느냐가 문제일 뿐.
그리고 그 어떤 설계도에도 빠져 있는 조항이 하나 있다. 지우개를 내려놓겠다는 조항.
장부가 얼어붙는 걸 두 번 봤다
1996년 홍콩 JP모건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이듬해 아시아 외환위기로 원화 장부의 값이 반토막 나는 걸 트레이딩 플로어에서 지켜봤다. 2008년엔 메릴린치가 BofA에 흡수되는 과정을 안에서 겪었다. 세계에서 가장 정교하다던 장부도, 신뢰가 빠져나가자 하룻밤에 얼어붙었다. 지금은 토큰화된 장부 위에 상장사 재무를 설계하는 일을 한다. 세 장면의 교훈은 하나로 수렴한다. 장부를 지키는 건 기술이 아니라 신뢰다.
종말이 아니라 교체다
원나라 교초가 무너졌을 때 화폐가 사라진 게 아니라 장부가 교체됐다. 브레튼우즈가 무너졌을 때도 같았다. 그리고 116년치 23개국 데이터가 말해주는 것 — 지우개질의 시대에도 생산 자산(주식)은 연평균 5%, 국채는 1.8%의 실질 수익을 냈다. 장부가 흔들릴 때 살아남는 건 장부 위의 숫자가 아니라 숫자 뒤의 생산력이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화폐의 종말이 아니라 세 번째 대교체 — 잉크와 지우개가 코드로 바뀌는 과정이다. BIS가 그리는 핀터넷(Finternet, 모든 자산이 토큰으로 연결되는 금융판 인터넷)은 그 교체의 설계도이고, 비트코인은 설계자가 약속을 어길 경우에 대비한 보험이다. 어느 쪽이 이기든 종이 장부로 돌아가는 시나리오는 없다. 물론 코드에도 지우개는 숨어 들어올 수 있다 — 관리자 키라는 점잖은 이름으로. 그래서 이 교체는 낙관도 비관도 아닌, 지켜봐야 할 협상이다.
같은 뉴스에서 화폐의 종말을 읽는 사람이 있고,
장부의 교체를 읽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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