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한국 정부의 정책 방향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정확히 정렬돼 있다. 문제는 방향이 아니다. 포지션 사이즈와 리스크 한도다. 종목은 교과서적으로 골랐는데, 단일 포지션에 전체 자본이 베팅된 형태다.
서류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운용계획서
정부가 내놓은 올해 정책 패키지를 펀드 운용계획서처럼 읽어보면 종목 선정은 A+다.
① 재정 — 성장률 목표 2.0%. 한은·KDI 전망(1.8%)을 상회하는 숫자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반도체 슈퍼사이클 초과 세수를 '미래대응기금'으로 전환해 구조적 재투자하는 구상이다. '3·4·5 비전'(잠재성장률 3%·수출 4강·소득 5만 달러)은 단기 달성 여부보다 포트폴리오의 방향성을 시장에 시그널링하는 장치로 읽힌다.
② 산업 — 글로벌 LLM 경쟁 대신 피지컬 AI에 집중 베팅. AIDC 550조 투자, M.AX를 통한 제조업 전반의 AI 전환. 세계 최고 제조 인프라에 지능을 덧씌우는 이 전략은 한국이 유일하게 가진 comparative advantage를 정확히 짚었다. 소버린 AI 수출 — 이집트 등 신흥국 7개국에 현지화 LLM 패키지를 수출하는 구상은 과거 K-방산이 가성비와 기술 이전으로 시장을 열었던 경로를 AI에 적용한 셈이다.
③ 규제 — 28년 만의 네거티브 전환. IMF 때 만든 규제개혁위에서 대통령 직속 규제합리화위원회로 격상. 자율주행 AI 학습용 원본 영상 데이터 허용, 도시 단위 메가특구 도입. 규제 권한을 부처의 방어적 기제에서 최고통수권자의 조정력으로 옮긴 점은 속도감 측면에서 올바른 방향이다.
④ 미디어 — AI 생성물 표시제, 14세 미만 SNS 가입 제한, 추천 알고리즘 투명성 강화. EU AI Act보다 반 박자 빠르게 정비 중이다. 민주주의와 청소년 보호라는 두 축을 동시에 잡으려는 시도.
CHIPS Act, CRMA, AI Act — 주요국이 쓰는 문법을 그대로, 몇 군데는 앞서 쓰고 있다.
운용계획서에 없는 페이지: 리스크 한도
정책 브리핑은 여기까지다. 지금부터는 이 계획서를 포지션 북으로 읽는 사람의 시각이다.
첫째, 단일 포지션 쏠림
코스피 9,000을 뜯어보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두 종목과, 그 둘을 기초자산으로 한 2배 레버리지 ETF의 기계적 매매가 만든 숫자다. 코스닥은 80% 폭락했다. 반도체 시총 비중 40%는 역사적 고점이지 방어 기제가 아니다. 펀더멘털이 아니라 구조적 수급이 가격을 만드는 국면 — 트레이더라면 누구나 아는, 가장 위험한 종류의 강세장이다. 반도체 사이클이 꺾였을 때 방어할 플랜 B가 없다는 분석이 벌써 나오고 있다.
둘째, 전력 인프라 병목
550조 AIDC는 '전기 먹는 하마'다. K-GX와 SMR이 제때 공급되지 않으면 세계 최고 사양의 데이터센터가 콘센트 앞에서 공회전한다. 정부가 K-GX를 AI 정책과 원패키지로 묶은 건 이 리스크를 정확히 인지했기 때문이다. 차세대 AI 패권의 승자는 알고리즘을 짠 국가가 아니라 발전소 인프라를 안정적으로 꽂아주는 국가다.
셋째, 규제 전환의 보이지 않는 벽
네거티브 규제가 대통령령으로 전환되어도, 현장 공무원의 감사 리스크와 소송 부담은 1초 만에 사라지지 않는다. 업계는 여전히 "정책이 뒤집혀 소송 걸리면 누가 책임질 거냐"고 묻고 있다. 적극행정 면책이 단순한 지침이 아니라 법률적 권리로 상향되지 않으면, 규제 개혁은 종이 위의 선언에 머문다.
The Historical Lens
1999년 닷컴 버블. '인터넷이 세상을 바꾼다'는 전망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그래도 나스닥은 고점 대비 78% 빠졌고, 방향을 정확히 맞힌 펀드들이 먼저 청산됐다. 시장은 전망이 아니라 포지션 관리로 생존자를 고른다. AI가 세상을 바꾼다는 이번 전망도 아마 맞을 것이다. 그것과 이 포트폴리오가 살아남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헤지는 이미 설계도 안에 있다
흥미로운 건 이 계획서에 헤지가 없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미래대응기금이 바로 그것이다 — 슈퍼사이클의 이익을 실현해 청년·지방·인재라는 다른 자산군으로 리밸런싱하는 구조. AI와 무탄소 에너지를 원패키지로 묶은 K-GX도 같은 맥락의 헤지다. 국가 정책에서 분산투자 개념을 도입한 셈이다.
지금의 쏠림과 병목은 시스템의 파국이 아니라 TradFi에서 NewFi로 가는 길목에서 생기는 진화의 흉터다. 설계는 이미 돼 있다. 남은 질문은 리밸런싱이 장부 위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집행되는가, 하나뿐이다.
코스피 9,000을 보는 사람에게 2026년은 슈퍼사이클의 해였고,
포지션 북을 보는 사람에게는 리밸런싱 마감 시한이 다가오는 해다.
본 자료는 정보 제공 목적이며 특정 자산·기업의 매수·매도 권유가 아닙니다. 정책 관련 서술은 공개된 정부 발표·언론 보도를 종합한 것으로, 해석은 필자 개인의 견해입니다. 모든 투자 판단과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